관계속의 나_파라솔과 바다

2025. 1. 31. 17:26에세이

6. #파라솔과 바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해변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이미 커다란 파라솔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는 듯이, 내 양손엔 둥근 원터치 텐트, 접이식 캠핑 의자 2개, 아이들의 비치타월과 구명조끼가 담긴 커다랗고 파란 방수가방이 들려있다. “엄마 잘 따라와”라고 말하면서 모래사장을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 같다. 이내 이 해변에서 나의 모습을 신경 쓰는 사람은 나 뿐이야 라며 안도한다.

 

원터치 텐트는 괜히 가져왔다. 친구가 가져온 의기양양한 아이보리색 파라솔 옆에 있으니 천덕꾸러기 같이 보인다. 끈을 풀자마자 확 펼쳐지는 모습은 고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리는 텐트를 접기엔 이미 체력이 바닥이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텐트가 안쓰러워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을 던져 넣는다. 나는 파라솔 뒤에 의자를 펴고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긴 하지만, 환영의 제스처는 없다. “어 왔어”라고 인사하는 게 전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신, 자연스럽게 일상이야기로 흐른다. “파라솔 어디에서 산 거야? 나도 사고 싶다.” “이케아에서 샀어. 나도 처음 개시했는데, 해의 방향에 따라 각도조절이 되는 건 몰랐네.”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반말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들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해야 하는 상대가 더 많아지는 거 아닐까.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는 순간, 반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적어도 내겐.

 

같은 교복을 입었던 우리는 세월의 기록에 따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공통점을 찾는다면 엄마가 되었다는 것. 그 이유로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가정사에 머문다. 나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대화를 하고 싶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사실 아무렴 어때, 라는 마음이 더 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친구가 엄마의 친구가 된다고 한다. 다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직장을 다녀서 아이 친구의 엄마와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기도 했거니와 성격상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쉽지 않다. 아이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나 싶긴 한데, 노력까지 해가며 어울리기에는 에너지가 없다. 아이의 사회성은 아이의 몫. 아이의 사회성까지 엄마가 챙겨줘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아, 결국 이 모든 건 인간관계가 서툴고 불편한 나의 성격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어쨌든 이런 이유로 나는 내 친구의 아이들을 만난다. 문제는 내 아이가 친구의 아이와 잘 지내란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선택권이 없는 아이는 친구의 아이와 잘 지낼 수도 있고 잘 못 지낼 수도 있다.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아이에게 늘 말한다.

“엄마는 엄마 친구 만나러갈 거야. 네가 친구들과 잘 지내지 않으면 앞으로 엄마와 같이 다니지 못해. 앞으로 계속 어울리고 싶으면 사이좋게 지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었는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가 원하는 대로 표현할 권리를 뺏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나의 시선은 아이들이 있는 바다를 향해있다.

“지금은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야. 무릎 높이 이상 들어가선 안 돼.” 아이가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한시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튜브를 가져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가 들어가서 같이 놀을 게 아니니 차라리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는 깊고 파도는 연신 밀려온다. 구명조끼를 입었다 해도 파도에 순식간에 밀려 중심을 잃을 수 있다. 대화에 집중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차라리 바다에 들어가는 게 나을까. 난 아이들에게 온 신경을 쓰면서 파라솔 아래에 앉아있다. 우리들의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가족 여행이 되어버린 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한 대화에 집중하진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과 어울리는 친구들을 찾겠지. 시간의 문제일 뿐, 우리도 우리끼리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테지. 그때까지는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친구들과 파라솔 아래에 앉아, 아이들이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