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1. 17:23ㆍ에세이
# 5. 학창시절 나는 세상을 몰랐다
공부를 잘했다.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기준이 없던 분이었다. 공부를 하라고 열을 올리신 적이 없는 걸 보면 나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학생이니 학교에 갔고, 선생님이 강의를 하니 들었다. 중간 고사든 기말고사든 시험을 본다니까 시험전후로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시험을 보니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했을 뿐,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은 없다. 부모님이 시험을 잘 봐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서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노력에 비해 공부를 잘했다. 최상위권은 아니어도 반에선 늘 1등이었고 전교 10등안에 드는 학생이었다. 성적 우수상을 늘 받다보면, 재수없겠지만 나중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진다. 한번은 할머니가 내 상장을 들고 동네 아주머니에게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엔 참 부끄러웠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주목 받는 일은 싫어했다. 그 이후로 상장을 받으면 앨범에 넣어 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내게 성적표를 보여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적표를 꺼내 보여드리면 잘했다고 한 마디 하시고선 누구에게도 자랑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잘하는 일에 우쭐해본 기억이 없다. 당시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게 구구크러스터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광고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게 보상의 전부였다.
존재감이 없었다. 머리만 좋아서 공부만 좀 잘했을 뿐, 매우 평범한 아이였다. 또래 친구와 갈등을 겪어 본 일도, 친구관계가 어려워서 힘든 적도 없었다. 그 흔한 여자친구들끼리 있는 묘한 갈등이나 긴장감도 없던 거 보면 나는 지나치게 수더분하고 어리숙한 아이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교과서에서 배웠을 뿐, 나의 청소년기는 파도 한번 치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오니 한 반에 날라리가 5명 정도 있었다. 날라리의 수는 중 2가 되면서 절반으로 늘어났고, 중 3이 되자 몇명만 제외하고 모두가 날라리가 되었다. 나는 소위 중품아에 살고 있어서 교실 창문으로 우리집이 보였다. 엄마는 내가 집을 나서면 나를 배웅하느라 늘 현관 밖에 나와 계셨다. 등교를 하다가 뒤돌아 집을 바라보면 엄마가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는 교문에 들어서며 엄마를 향해 한번 손을 흔들었고, 실내화를 갈아신으며 손을 흔들었고, 교실에 올라오자마자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내가 교실에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집으로 들어가셨다. 학창시절, 다른 아이들이 이성에 눈뜨고, 친구와 끈끈한 우정을 쌓을 때, 여전히 엄마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게 자란 나는 당시 유행하던 외고에 들어갔다. 외고에 가도 역시 날라리는 있었는데(생겼던가) 공부를 못하진 않았다. 선생님들 중에는 우리보고 싸가지가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그런 말을 단체로 들으면서도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보다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를 고민했다.
주변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그때에도 거시적으로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 여자 아이가 교탁앞에 나와 울면서 말한 적도 있었고, 어떤 아이의 우유팩이 바닥에 터져서 우유가 쏟아진 적도 있었는데, 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말 한번 섞지 않았던 그 여자아이에게 힘내라고 쪽지를 준 기억은 있지만 나는 그 이후 그 일을 잊었다.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은근히 괴롭히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일들이었다.
나는 내 자리 주변 친구들과 어울렸다. 가치관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좋다고 하는 ‘긍정’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도 고민도 없던 나는 친구들과 웃으며 지내고 싶었고, 밝게 지내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나에게 밝고 긍정적이고 단순하다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게 나의 거울이라 여겼다.
내 주변의 세상은 늘 평온했고 따뜻했다. 학창시절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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