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부장

2021. 1. 9. 03:01무심한 날들

규정대로 하니, 방법이 없네요.

 

5학년 부장을 맡아 달라는 교감선생님의 말씀.

 

그 말을 전해 듣기 전에는 학년부장님들이 참석한 인사위원회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동학년 선생님들이랑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대화들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회의가 심각하게 진행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갬샘(감성 선생님) 프로젝트>라는 말도 안되는 주제로 누가 더 감성적인가를 배틀하듯, 오후 대낮에 서로의 오글거리는 글들을 메신저 창에 나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올해는 나를 좀 더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말하던 참이었다. 회의는 참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업무분장은 이미 나왔어야 했다. 교감선생님은 학년말에 업무희망서를 취합했고, 그를 바탕으로 오늘 결과를 안내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교감선생님의 인사방식은 규정 이전에 인간적인 호소에 바탕을 두었고, 그것도 안된다면 그냥 비워둔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교장선생님의 생각은 학교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엔 납득이 잘 되지 않았으나, 인사는 교장선생님의 권한이었다. 생각보다 교장선생님은 다른 이의 말에 설득이 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업무분장만큼은.

 

결과적으로 나는 캐스커의 음악을 오랫만에 들어보려던 찰나, 교무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교감선생님이 회의실로 내려오시라는데요>

 

불길한 예감을 갖고 계단을 내려가며 회의실에서 방금 나온 전년도 부장님들의 얼굴을 본다. 나를 보며 뭔가를 알고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올라가는 선생님들. 속으로 <이게 뭐라고 진지하지> 라는  생각을 한다. 막상 내 일이 닥치는 순간에도 늘 마치 그 상황의 관찰자인양 행세하고 만다.

 

교감선생님은 규정대로 하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적어도 교감선생님은 심플했다. 나도 심플하게 대답했다.

 

규정이 그렇다니 제가 해야죠.

 

나와 같이 부장으로 지명된 우리학년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의 부탁인듯, 강압인듯, 위압인듯 한 발언에도 소신있게 거절을 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인사규정에도 없는 규정을 급조해서 넣어 지명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의 뒷모습에 대고 거절의 예를 갖추는 모습이, 조금 비장해 보였다. (사실 난 그 상황에서도 이게 뭔가 하는 심정이긴 했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리 심각한거지. 그럼에도 나는 교장실에서 꽤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 상황에 몰입한 척을 하긴 했다) 

 

차라리 나는 우리 학교 인사규정에 너무 꼭 들어맞았기에 거절할 길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내가 부장역할을 잘할 만큼 역량도 상황도 아니라는 건 너무나 명확하다. 현실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면 첫째의 수업은 누가 봐줄 것이며, 만약 둘째도 온라인 수업을 한다면 그 아이는 누가 봐주지. 현타가 온다는 건 아마 이런 순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오는 긍정인지 나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 크다. 첫째아이는 내가 교실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으면, 그 아이는 뭐 연구실 어디 구석탱이에서 자기 반 온라인 수업을 듣겠지 하는 마음. 둘째도 온라인 수업이라면 그 역시 어디든 가서 하겠지 하는 말도 안되는 마음이 그냥 드는 것이다.

 

현실에서 조금 10 센티미터 정도 떠 있어서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막상 현타가 온다 해도 놀랄만한 것이 없다는 좋은 점도 있다.  물론 내게 닥친 현실을 명확히 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늘 그랬듯이 그냥 의연할 것만 같다. 어차피 모두 지나잖아. 그냥 죽지만 않으면 되는거잖아 싶은 마음인가보다. 살아남으면 되는거잖아. 그리고 그럴 의지를 불태울 것도 아닌, 이건 그저 부장자리일 뿐인걸 뭐.

 

 

 

 

 

'무심한 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어는 어려워  (0) 2025.01.31
주말부부  (0) 2025.01.31
책 정리  (2) 2025.01.31
코로나 시대의 방학  (0) 2021.01.08
폭설  (0) 2021.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