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1. 17:35ㆍ에세이
# 14. 돌아가고 싶은 순간
S에게
“인도에 가야 해.” 나는 명상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고, 실제 위빠사나 명상이 어떤지 알려면 부처가 직접 수행을 하던 곳에 가야 한다고 말했지. 일반적인 인도여행루트가 아닌 부처의 생애를 밟는 루트는 인도의 북동쪽, 현지에서도 몹시 가난한 비하르주에 있지. 여행 책자에 소개도 많지 않은 그런 곳.
한 달 정도의 여행을 계획하며, 그 일정 중 10일 정도는 명상센터에 가는 거였어. 너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 넌 별거 아닌 듯 알겠다고 말했어. 생각해보면 넌 다니던 직장이 있었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내려면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었어. 네가 마치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듯 쉽게 말해서 나는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어. 그냥 너라면 직장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땐 나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듯 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니까
보드가야로 가는 열차였는지, 델리로 가는 열차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어쩌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어. 너도, 나도 인도여행이 처음은 아니었던가. 난 처음은 아니었는데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우린 그렇게 가까웠는데 그것도 물어보지 않았나 봐. 그래도 나는 이런 여행이 익숙했고, 너는 가이드도 했으니까 이런 배낭여행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어.
야간열차였던 건 확실해. 침대칸을 못 구했는지 창문 앞에 있는 기다랗고 좁은 의자에 앉아 있었어. 의자 양쪽 끝에 쪼그려 앉아 숄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잖아. 우리가 덮었던 담요는 분명히 파란색이었는데 열차의 흐릿한 형광등 덕분에 더 짙은 푸른색으로 보였어. 그 숄 기억나? 파란색인 걸 보면 우리나라 항공은 아니었던 것 같고, 타이 항공이었을까. 항공 담요를 대놓고 가져왔던 때도 있으니까 항공 담요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도 길바닥에서 파는 100루피짜리 숄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배낭여행을 할 때는 숄이든 담요든 꼭 필요하니까. 앉아서 자는 게 쉽지 않으니 자다 깨다 반복했는데, 창문 밖은 어쩜 그렇게 짙은 흑색이었을까. 바람에 덜덜거리는 창문은 자꾸 조금씩 열렸고, 나는 한 손으로는 내 몸에 두른 숄을 꼭 잡고, 한 손으로는 창문을 잡고 있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다가 자는 너를 보면 우리의 미래가 이 밤처럼 어둡다고 생각했어
자정까지 떠들어도 새벽이 되면 모두 잠이 들었던 열차. 힌디어로 울리던 다음 정차역 안내방송 소리는 참 컸던 것 같아. 그래도 난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알진 못하지만, 어딘가 도착했다고 말하는 그 방송이 왜 그리 마음에 위안을 줬는지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아.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그냥 우린 길 위에 있게 되잖아. 답이 있다고 말하면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어. 하지만 난 답을 찾지 못할 것 같았거든. 힌디어 안내방송은 내게 그런 게 아니었을까. 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이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 너도 그랬을까.
안내 방송보다는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이 더 믿을 만 했지. 열차에 오르면 늘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릴 쳐다보던 사람들, 그들에게 눈인사하면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지. 그 의미는 아직도 모호하긴 해. 인사를 받아준 건지, 여기에 자리가 있다는 건지. 웃음기 없이 고개만 까딱. 자리를 잡고 앉아 늘 우리의 목적지를 말했어. 인도열차는 제시간에 도착하는 법이 없어서 우리의 목적지도 제시간에 도착하리란 보장이 없었고. 열차 시간표가 나온 안내장도 믿을 만하진 않았으니까. 현지인들은 늘 친절하게 알려줬어. 그들 덕분에 새벽의 한가운데에 거지꼴로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자물쇠로 잠가놓은 배낭을 서둘러 풀고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어.
사람이 없어도 무섭고, 사람이 있어도 무서웠던 한밤의 기차역. 해가 밝아오길 기다리면서 한없이 기다리던 시간. 그때 네가 옆에 있어서 참 든든했어. 우린 말이 별로 없었지만, 말이 별로 필요 없던 사이이기도 했어. 그냥 내가 여기에 가야 해 라고 하면, 넌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왔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 열차가 제시간에 안 오면 그냥 기다렸고, 열차가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 갈 곳을 잃어도 괜찮았잖아. 새벽을 알리는 짜이 한잔이면 충분했던 시간, 기차역에서 맞이하는 새벽도, 너의 흐릿한 얼굴도, 그 달달한 밀크티도 참 그립다. 그 순간이 그리운 건, 그때의 우린 인도의 열차처럼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곳으로 가도 되고 저곳으로 가도 되었던 그때는 불안했지만 자유로웠잖아. 지금 나는 단단하게 살고 있는데, 늘 흐릿했던 너는 지금 선명하게 살고 있을까.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간_봉은사 (0) | 2025.02.01 |
---|---|
글쓰는 사람이 된 이유 (2) | 2025.01.31 |
최초의 기억_엄마가 되는 것 (1) | 2025.01.31 |
아침풍경_방학 (1) | 2025.01.31 |
상상_초능력이 생긴다면 (2) | 2025.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