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_초능력이 생긴다면

2025. 1. 31. 17:31에세이

 

#11.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다.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 나는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 가끔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을 만큼 피곤한데,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살려고 먹는 흑염소 진액. 고작 80mL 밖에 안되는 양이지만, 정성 들여 전자레인지에 돌려 마신다. 내 몸에 흑염소 에너지가 퍼지길 기대하면서. 가끔 더 피곤한 것 같으면 고용량 비타민 B 복합체를 먹는다. 한 알 크기도 상당해서, 한 개만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다.

 

“아침 안 먹니? 네가 먼저 먹어야 아이들이 잘 먹는 거야.” 어머님의 말씀은 나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 나는 아이들의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쯤 되는 건가. 피곤하니 모든 말들이 다 귀찮다. 잠깐이라도 소파에 앉아서 쉬고 싶은데, 아이들과 같이 밥이라도 한술 떠야 하나. “아침 먹으면 속이 안 좋아서요. 헤헤” 그냥 이 시간이 얼른 흘렀으면 좋겠다. 출근해서 커피 한 컵 들이키고 싶은데. 미식가들이 들으면 난리 날 소리겠지만, 캡슐 하나로 한 끼가 해결되면 좋겠다. 냉장고도 필요 없다. 그냥 갖가지 색깔의 캡슐 통만 갖고 다니다가 필요한 영양소만 섞어 먹으면 한 끼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람 소리도 싫지만, 아이들의 징징거리는 소리는 더 싫다. 무엇을 위해서 우린 이렇게 아침부터 일어나는 걸까. 천성이 게으른데다가 야행성인 나는, 바쁜 아침이 날마다 적응이 안 된다. 고작 7살밖에 안 된 아이는 무엇을 위해서 아침부터 유치원에 가고, 고작 9살밖에 안 된 첫째는 왜 바쁘게 아침부터 국어, 수학을 배워야 하는 거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지금은 다행히 교육부로 개편된 이름. 처음에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에 어이없고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아, 우린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자원이 되어야 하는 건가? 내가 자원이 되겠다고 자원한 적도 없는데, 왜 나를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거야?

 

그래도 다행히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깬다. 일은 천성에 맞는 편이다. 체계적인 틀은 있지만, 그 안에 꽤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다. 위계나 서열 관계도 타 직업 대비 수평적인 구조라 편히 일하는 편. 감사해야 하나. 이 직업의 최대 단점은 계속 서 있어야 하고, 계속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휴식 시간이 있긴 하지만 매우 시끄러운 곳에서 쉬어야 한다는 점. 그래서 집에 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 집은 티브이를 틀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티브이를 트는데, 자막 나오니까 무음으로 보라고 하기도 한다.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아이들의 공부를 봐준다. 9살도 7살도 할 일이 많다. 아무 생각 없는 아이들에게 “얼른 숙제해.”라고 말을 끝내자마자, 내 자신도 납득이 안 되는 이 말의 무게가 참 가볍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떠올린다. 오늘도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오르는 시시포스, 돌덩이는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진다. 인간의 숙명인가. 근면 성실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 것만 같은 삶을 살다 보니, 옆에서 계속 돌을 이고 지고 다니는 걸 보니, 나도 돌을 어깨에 지고 걷는다. 왜 그 바위를 지고 걸어가냐고 묻는다면, 이건 디폴트값이라고 대답한다.

 

저녁나절을 계속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이젠 잘 시간이다. 오늘도 디폴트값만 했는데, 하루가 가버렸다. 내게 초능력이 있다면 하루를 29시간으로 늘리면 어떨까. 24시간은 바위를 이고 올랐다면 5시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고 싶다. 그 시간은 딱 나처럼 온종일 기본값만 한 사람들에게만 줬으면 좋겠다. 책을 읽어도 되고, 드라이브를 하러 가도 되고, 친구를 만나도 되는 시간. 별을 봐도 되고 바다를 봐도 되는 시간. 그런 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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