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이 된 이유

2025. 1. 31. 17:36에세이

# 15. 글을 쓰게 된 이유

 

 

1997년 가을, IMF가 터지던 그해,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당시 학생들이 다 그랬겠지만, 난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기업에 다니시던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말씀하셨다. “여자는 교사가 제일 좋아. 교육대학교에 가.” 내가 반 친구들에게 교육대학교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야, 00이가 교대에 간대. 상상도 안 돼.”라며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해 교대 경쟁률이 8대 1이었던가. IMF의 여파로 인해 교육대학교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 정도면 안정권이라 생각하며 넣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그렇게 교사를 양성하는 특수목적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대학교에 들어오며 어울린 친구들과 핀트가 잘 맞지 않았다. 이건 나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대학교 4년 내내 싸움 한번 한 적이 없었다. 4총사처럼 붙어 다녔다. 교대 수업은 모두 조별 발표 수업이라 혼자 할 수 없었으니까. 뭔지 모르지만 그들과 모래처럼 섞이지 않았다. 이건 처음 하는 고백. 나는 대학 시절 겉돌았다. 친구들에게는 내 꿈은 졸업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잘못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일반적이고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니까. 뒷말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달리 남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정도. 나는 나에게 관심이 많은데, 남에게 관심이 많다는 정도. 대화 주제가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시절 100명이나 모인 수업에서 MBTI 검사를 한 적이 있다. 과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성격검사를 한 후, 같은 성격끼리 모이라고 했다. 검사지가 알쏭달쏭해서 한참을 보고 있었던가. 고민하는 내게 M은 “넌 INTP야. O랑 같네.”라며 웃었다. 다른 성격유형은 적어도 대여섯명은 모여있는 것 같은데, 그 100명도 넘는 강당에서 단둘만 같은 성격이라니. 게다가 그 아이는 특이하다고 소문난 학생. ‘내 성격이 저렇다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속으로 그들을 미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수 인원에 속한다는 게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내 성격을 함부로 결정하는 무례함이 싫었을까. 몇번의 비슷한 일들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다해 멀어졌다. 4년 내내 붙어 다니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다.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마음이 지나치게 여렸겠지. 아쉬우거라면 그때 M이 웃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 웃음만 아니었다면 내 성격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말이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되면서 글로 나를 표현해야 했다.

 

20대는 불안과 외로움의 역사였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나를 증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서기 위한 노력은 그때부터였다. 철학에 기대고, 여행에 기대고, 사랑에 기대면서.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 내 실루엣이 마치 연기 같았던 날들. 내가 기댄 것들 덕분에 나는 조금은 단단해졌다.

 

이젠 난 삶이 외롭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가족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현실에 잘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된 것은 맞지만. 이젠 외롭거나 불안해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여전히 부서지고 조각난 기억을 다듬고 채워가며 글을 쓰는 건, 그게 내 삶에서 해야할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지. “당신의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인내로 대하십시오.” 기억의 조각들은 가벼운 에피소드가 되어 물 위로 튀어 오른다. 나는 튀어 오른 물방울 하나를 잡고 글을 쓴다. 내 안에는 깊은 감정의 바다가 유유히 흐른다. 끝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만 건져 올린 삶의 조각들로 나를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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