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1. 16:34ㆍ서평
이 책은 보통 우리가 소설이라고 말하는 형식을 벗어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옮긴이의 말을 읽지 않았다면, 끝까지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소설은 주인공이 등장하고 사건이 발생하고 일련의 인과적인 흐름을 거쳐 사건이 마무리가 되는 형태라면, 이 책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는 않다. 오직 주인공이 머물거나 이동하는 장소에서의 경험을 나열한다. 이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장소는 낱낱의 개별적인 경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책의 소제목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다.
카페에서, 기차에서, 서점에서, 대기실에서, 심리상담사의 집에서, 발코니에서. 등등
작가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각각의 장소에서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주변인물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쓰고 있다.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간 점이 인상적이다. 왜냐햐면 오직 장소만이 나의 위치를 확실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공간의 한 시점을 벗어난 지점에 있을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물리적인 나는 언제나 공간을 점유한다. 그럼 정신적인 나는 그런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할 수 있나 생각해본다면 그 역시 불가능하다. 나의 생각 역시 내가 딛고 있는 이 장소에서 누군가와의 마주침에 의한 결과이거나 과거에 어느 공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던 그 경험들의 산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어디에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만 같다.
주인공은 늘 어떤 장소에 도착하고 그 장소에서 만나는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들을 관찰하지만 늘 외롭고 쓸쓸하다. 아주 작은 마주침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일렁임을 경험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참 안쓰럽다.어떤 장소에서도 자신이 주인이 아닌 것만 같다. 늘 어색하게 주변인처럼 서서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진짜 주인공들을 관찰하는 듯하다. 해변에 가서도 바다로 뛰어들지 못하고 그늘속에 숨어있거나, 자기 사무실에서 조차 자신의 물건을 갖다 놔야만 하는 사람. 유부남 친구의 작은 성의에도 이대로도 내 삶은 괜찮다고 여길만큼 외로운 사람. 어느 장소에서도 발 붙이지 못하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환경 곧 물리적 공간, 빛, 벽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이 맑은 하늘 아래 있는지 빗속에 있는지 여름 날 맑은 물속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차 안인지 자동차 안인지, 해파리때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여러 모양의 구름들을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인지는,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동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서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p.189
길지 않은 소설인데다가 단편적인 경험들이라 어느 꼭지를 먼저 읽어도 괜찮다. 주인공과 주변인의 대화들과 자신의 독백, 나이가 들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의 그늘, 쓸쓸하고 외로운 글들을 마주하다 보면, 주인공의 삶에 공감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는다. 머물지 않고 늘 떠나기를. 늘 길위에 있기를 갈망하는 누군가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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