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우울증
2008년 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고 지쳐서 우울증으로 질병휴직을 했다. 내 주변의 누구와도 상의한번 해본 적 없다. 그 시기 표면적으로는 우울했지만, 대학원 논문 마지막 학기라 논문을 쓰는데 집중하고 싶기도 했다. 아니다. 논문은 트리거일뿐, 내밀한 이유는 그냥 세상 밖의 이방인이 되고 싶었다. 무엇의 00이 아닌, 그저 내 이름으로 존재하고 싶었다는 게 제일 큰 이유일 것 같다.
2008년 3월, 논문자료를 읽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고 그냥 자기엔 아쉽고 다가오는 날은 막막하게 여겨지던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방문을 딸깍 잠그고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주방가위도 아니고 그냥 학용품 가위를 갖고 싹둑싹둑, 이 역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늘 생각을 혼자 하다가 어느 순간, 오늘 아니면 안될 것 같은 그런 때에 뭔가를 한다. 전후 사정 없는 즉흥의 극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오랜기간, 머릿속으로 생각해왔던 to do list 인 셈이다. 딸깍 소리를 기다린건지, 아니면 그 당시의 나를 주시한 건지 엄마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너 지금 머리자르지!! ' 하던 게 생각난다. 그래, 삭발하고 싶다고 여러번 말을 했지만, 한번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진 못했다. 머리카락을 대충 자르고 나오니, 엄마의 첫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스포츠 머리를 할 생각도 있었는데, 엄마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시더니 반질반질 윤이 나게, 면도칼로 머리를 밀어주셨다. 시집을 가도 모자랄 그 나이에, 삭발하는 딸을 보는 마음이 어땠을까. 뭐 별 생각이 없으니 그냥 밀어주셨을 것 같기도 하고,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애를 어쩌지 못했을 수도 있고.나의 20대는 참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했다. 본연의 삶 자체가 주는 불안함에, 참 마음 둘데가 없었다. 눈을 뜨는 것도 무섭고, 사는 것도 무섭고, 하루의 반복으로 결국 죽음에 이를 거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두렵고 불안했다.
나는 3개월 정도를 제주도의 한 절에서 보냈다. 아는 스님이 있다는 이유로, 지금처럼 템플스테이가 활성화된 때가 아니라서 그냥 절 일을 좀 도와주며 무상으로 먹고 자고 살았다. 여행온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누구도 나에 대해 관심이 없고, 나는 나대로 논문쓰고 책 보고. 어떤 때에는 불교 여름캠프도 좀 도와드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무단취식이 합리화가 되는 건 아니지만. 당시 헤어진 남자친구와도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으니 더 쉽게 잊을 수 있었다. 당시 주지스님은 내가 절에서 일하는 보살님, 거사님들과 섞이지 않을 것을 걱정하신 모양인데, 생각보다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6개월의 휴직 후 복직을 했다. 삭발한 나를 보는 선생님들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불교학 전공자인 내게)교회 팜플렛을 주시기도 했는데 약간 웃기면서도 고마웠다. 그 선생님은 나와 동학년을 함께 했던,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며, 화장을 하나도 안했는데 피부가 좋네. 라고 하셨던 선생님도 기억나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이상하고 신기해 보였을까. 당시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인생에 한번쯤 삭발을 해보고 싶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였는데. 6개월 후 복직한 다음 나는 참 마음이 가벼워져 있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즐겨 입었고, 검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머리카락도 조금 자라서 그렇게 불편한 외모도 아니었던 것 같다. 6개월의 휴직이 내게 준 게 참 많았다. 굳이 말로 하자면 현실에서 약간 비껴서서 삶을 여행처럼 살아도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