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이라는 세 편의 중편소설을 합친 연작소설이다. 작가에 따르면 채식주의자는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그 단편이 한 여자가 식물이 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작중 주인공인 영혜가 나무가 된 이야기이다. 작가는 세편의 소설이 쓰여진 시점이 다 다르고, 각 편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함께 모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보통의 소설에서는 찾기 힘든 방식이라 자연스러운 연결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 있다. 구성의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가독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세 편 모두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에서 묘사하고 있어 독자는 이미 읽어봤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세편의 중편이 모여있긴 하나, 시점의 변주일 뿐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채식주의자는 남편, 몽고반점은 형부, 나무불꽃은 영혜의 언니의 시점으로 쓰여져 있다. 모두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변화와 갈등이 주된 스토리이다. 주인공이 영혜임에도 소설속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는 없다. 주변인에 의해 그녀는 관찰되고 묘사될 뿐이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한눈에 그려질 만큼 묘사방식이 섬세하고 치밀하다.
작중 주인공인 영혜는 어떤 계기로 인해 채식주의자가 되고 더 나아가 나무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종국에는 자신이 나무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된 직접적인 원인을 이 책에서 찾기는 힘들다. 나름 유추해보자면 어린시절 아버지가 자신(영혜)의 허벅다리를 문 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고, 그때의 충격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날부터인가 괴기스러운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으로 인해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계기가 모티브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이상행동까지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그녀의 기본적인 성향 자체가 채식주의자가 될 소지가 다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채식주의를 넘어 극단적인 이상행동으로 나아가는데는 주변인물들의 폭력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녀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불편함에 대해 특별한 고민없이 거부하는 여자라는 것. 한 예로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브래지어는 여성의 아름다운 선을 돋보이게 하는 속옷이다. 홈쇼핑에서 광고하는 브래지어는 단순히 젖꼭지를 가리는 용도가 아니다. 가슴을 모아주고 쳐지지 않게 하고 심지어 뒷태의 살까지 가슴처럼 만들어주는 기능을 갖춘 속옷. 속에 입는 옷인데도 그 무늬며 색의 화려함까지 생각한다면 단순히 브래지어는 속옷 이상의 상징성이 있는 물건이다. 브래지어는 여성의 옷이긴 하나, 그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건 남성이다. 결국 브래지어를 입는다는 건 가슴을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 남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브래지어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다.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폭력.
그녀는 잔인하고 괴기스러운 꿈을 꾸기 이전부터 제도나 관습,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은 그녀가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자 한 가치가 아니라 그저 그런 사람이었던 것. 브래지어 정도야 내 몸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면 쉽게 안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 원래 삶 자체에 큰 열망을 갖지 않은 소위 식물같은 인간이었던 게다. 한번도 소리를 내어 걸어본적이 없을 것 같은 발걸음으로 공기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조용히 살것만 같은 사람. 그런 성향을 타고난 영헤는 아버지의 거친 말투와 무딘 감성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왔을까.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여린 감성을 타고 난 데다가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에 마음을 다치게 되어 더욱 속으로 침잠하게 되었을 그녀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프다. 그저 브래지어를 안하듯 육식을 멀리하고 싶었던 것 뿐인 그녀는 육식을 강요받으며 차라리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다. 작중에서는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에 대해 지나칠만큼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특히 그녀의 남편은 '평범'하다는 이유로 선택한 여자가 채식이라는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한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자기의 부인이 브레지어도 안한 채, 고집스럽게 채식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나 부끄러운 남자이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다 큰 딸의 입에 고기를 쑤셔넣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다. 한번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을 것 같은 그녀는 그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대신 내부로 더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아무도 해치지 않는 나무가 되기를 욕망한다. 피와 살이 대표하는 동물성을 포기하면서 일체의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혈색이 도는 피부 대신 창백한 얼굴을 택하고 탄탄한 살집 대신 뼈밖에 안남은 몸을 택한 그녀는 진짜 나무가 되어간다. 그녀가 타인과 소통이란 걸 해본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타인과의 소통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역시 그녀에겐 폭력적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죽으면 안돼? 라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결국 소통을 선택하느냐 마는냐도 개개인의 선택으로 둔다면 나무가 되기를 원한 그녀는 행복해졌을까.
작중에서 영혜의 언니는 영혜가 그렇게 된 이유를 계속 반추하며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변해가는 동생의 모습을 묵묵히 견디며 처참해진 자신의 삶과 그녀의 삶을 수습한다. 그러면서 영혜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인헤의 모습은 대부분의 우리와 비슷하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치는 걸로 상황을 도피하는 대신 그 상황에서 어른스럽게 책임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게 대부분의 우리 삶이니까. 자신을 위로하는 대신 타인을 위로하며 위로받는 그녀의 모습이 영혜보다 더 슬프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우리에게 노출된 폭력과 그로인한 상처에 대해서 생각했다. 폭력과 상처에 대응하는 길이 영혜가 선택한 나무가 되는 거라면 우리는 모두 나무가 되고자 해야할까. 작가가 생각하는 나무의 이미지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긴 하다. 어떠한 폭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땅으로 내뻗어 굳건히 서있는 존재. 한 때 나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내 안에 심지가 곧고 단단하여 살랑거리며 부는 봄바람에 마음 시리지 않고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혜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어떠한 자극에도 모든 걸 품어서 무로 만들어 버리는 나무가 아니라 타인과의 마주침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적응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작가는 우리가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며 살고 있고 그 간섭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무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채 가벼운 농담만 하며 지내도 괜찮을 삶이라면 그것도 삶의 한 방법이겠구나 싶다. 누군가에겐 한강의 서늘하고 잔잔한 문체가 위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