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_봉은사
집에서 봉은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 본 적은 없지만 걸어갈 수도 있는 길이다. J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전 9시, <편의점 앞에서 기다려> 라고 쓰다가 다시 <기다려요> 라고 고쳐 메시지를 전송한다. 나무 그늘이 짙어지는 계절,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의 소리 없는 움직임을 보며 어떤 것도 헤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자처럼 걸어 본다.
15년 만에 만나는 J. 그가 편의점 앞에 앉아있다. 마치 어제도 그제도 계속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린 것처럼 자연스럽다. 우린 서로를 보자마자 소리 내어 웃는다.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J의 손이 어색할까 살짝 네 손을 잡고 놓는다. 그 1초의 촉감으로도 그의 손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1초의 마주침 덕분에 그가 늘 옆에 앉아있던 순간들과 손을 잡고 걸어 다녔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낮게 흐르던 공기의 흐름이 섞이며 너와 나의 분위기가 섞인다. 마치 우리 사이에 어떤 틈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예전처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난 우리가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꽤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였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서로에게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던 사이. J 앞에서는 힘낼 필요가 없었다. 에너지 없이 기대어 있고 싶을 때에는 기대어 있었고, 걷고 싶을 때에는 손을 잡고 걸었다. 내가 흥분해서 화를 내도, 짓궂은 장난을 쳐도 흐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짓던 사람이란 것만 기억난다.
우린 여전히 기억나지도 않을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J는 지나가던 길목에서 보이던 HDC 현대 산업 개발 로고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난 여기가 홍콩이라고 생각할 거야. 저기 봐. 홍콩 디지털 센터.”
HDC 로고를 홍콩 디지털 센터라고 바꿔 말하는 그를 보며, 우리가 이런 대화들을 했던 걸 떠올린다. 그와 있으면 현실에서 약간 비켜서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든 가상의 섬에서 키득거리며 웃던 날들은 현실감이 없어 불안했지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유로웠다. 그는 늘 내게 현실감이 없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땐 J가 늘 가상현실에 사는 사람 같았다.
“넌 삶이 가상현실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J가 묻는다.
“삶이 가상현실이건 아니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현실이 무엇이든 실제로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건 확실하잖아.” 난 무심하게 대답한다.
봉은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색색의 연등이 가득하다. 연등이 만들어내는 빛이 아름답다. 평소에는 대웅전부터 먼저 가지만, 오늘은 봉은사 뒤편의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의자에 앉아 미륵불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서울 강남 한복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미륵불의 모습이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비록 고되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미륵불을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도 가상현실과 뭐가 다를까. 현세에 살고 있는 미륵불을 보며, 그가 말한 홍콩 디지털 센터를 떠올린다. 미륵불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봉은사를 나온다. <저 미륵불이 우릴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줄까>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는 다시 홍콩디지털센터를 바라보며 말한다.
“우린 지금 여행중이야” J가 말한다.
난 대답 대신 웃는다.